전통발효 및 효소과학
한국 전통 음식의 깊고 복합적인 맛은 단순한 조리기술의 산물이 아니다.
그 중심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음식 전체의 구조를 바꾸는 효소(Enzyme)라는 생화학적 촉매가 있다.
효소는 재료 속 단백질·전분·지방을 잘게 분해해 더 작은 분자로 전환하고, 이 과정에서 음식의 맛·향·식감·소화도까지 바꾼다.
특히 전통 발효식품은 자연 미생물이 만들어내는 효소가 장기간 작용하면서, 열을 이용해 조리하는 방식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풍미를 구현한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 조상들이 과학적 장비 없이 효소 활성이 가장 잘 일어나는 조건을 감각적으로 찾아냈다는 사실이다.
온도와 습도, 염도를 조절해 “익는 속도”와 “숙성 깊이”를 맞춘 전통 방식은 현대 발효공학의 원리와도 상당히 유사하다.
전통 음식은 단순한 ‘옛 맛’이 아니라 세대에 걸쳐 축적된 자연 생화학 실험의 산물이며, 그 중심 설계자는 바로 효소라 할 수 있다.
된장과 프로테아제
전통 장류의 대표격인 된장(Doenjang)은 다양한 미생물이 공존하며 복잡한 효소 반응을 일으키는 독특한 식품이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단백질을 잘게 부수는 프로테아제(protease)다.
콩 단백질이 프로테아제의 작용을 받으면 크고 작은 펩타이드, 아미노산으로 전환되며, 이 성분들이 된장 특유의 감칠맛과 고소함을 만든다.
특히 글루탐산과 같은 자유 아미노산은 맛의 깊이를 크게 강화한다.
장이 오래 숙성될수록 맛이 더 부드럽고 균형 있게 변하는 이유는 바로 이 효소가 천천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단백질 분해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점은 프로테아제는 열에 약해 장을 심하게 끓이면 풍미가 약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된장을 활용한 전통 요리는 보통 강한 가열보다는 은근한 끓임이나 낮은 온도의 조리를 선택해 효소가 남긴 풍미를 최대한 살리려 했다.
이는 조상들의 조리 방식에 효소에 대한 무의식적 이해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고추장의 아밀라아제
고추장은 매운맛만 있는 양념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보았을 때 전분과 당의 변화가 복합적으로 얽힌 발효식품이다.
여기서 핵심 역할을 하는 효소는 바로 아밀라아제(amylase)로, 곡물 속 전분을 포도당과 말토오스 같은 단당류로 분해한다.
이 과정에서 고추장은 독특한 은은한 단맛을 얻게 되고, 고추 특유의 매운맛·짠맛과 균형을 이루어 부드럽고 조화로운 맛을 만든다.
아밀라아제의 활성이 높을수록 단맛이 더 복합적으로 형성되며, 숙성 기간이 길어질수록 맛의 결이 깊어진다.
또한 아밀라아제가 만들어낸 당류는 미생물의 에너지원이 되어 2차 발효 반응을 촉진한다.
이때 생기는 다양한 향 성분이 고추장의 복합적인 풍미를 형성하는데, 이는 장기간 발효가 단순한 숙성이 아니라 다단계 효소 반응이 누적된 과정임을 보여준다.
결국 고추장의 맛은 고춧가루와 메줏가루의 조합뿐 아니라 효소가 얼마나 활발히 작동했는가에 따라 큰 차이를 낸다.
![[재미있는 과학] 한국 전통 음식 속 숨은 효소 이야기](https://blog.kakaocdn.net/dna/MlkpX/dJMcacVL9md/AAAAAAAAAAAAAAAAAAAAAPKh9UKjD9DMSUqn_JhvTKVMB8dQi_nTSjnstoIMylXN/img.png?credential=yqXZFxpELC7KVnFOS48ylbz2pIh7yKj8&expires=1767193199&allow_ip=&allow_referer=&signature=dm7oakvZbMGDBDuhm0cJZ%2BrKqaM%3D)
김치·젓갈의 리파아제·셀룰라아제
김치와 젓갈은 각각 식물성과 동물성 식품이기에 작동하는 효소의 종류도 다채롭다.
김치 속에서는 식물 섬유질을 분해하는 셀룰라아제(cellulase)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효소는 배추·무의 섬유를 서서히 분해해 김치가 숙성할수록 아삭함에서 부드러움으로 변화하는 식감을 만든다.
또한 셀룰라아제가 만든 당류는 젖산균의 먹이가 되어 발효를 가속하고, 그 결과 산미가 점차 깊어지며 숙성의 방향이 달라진다.
반면 젓갈에서는 지방을 분해하는 리파아제(lipase)가 중심적이다.
리파아제는 생선이나 해산물 속 지방을 잘게 쪼개 풍미 강한 지방산을 생성하고, 이 과정에서 젓갈 특유의 진하고 고급스러운 향미가 생겨난다.
일부 지방산은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성분과 반응해 독특한 숙성 향을 만들며, 이는 단순한 비린 향과 구분되는 깊은 풍미의 근원이 된다. 이런 효소 작용 때문에 젓갈은 조금만 사용해도 음식 전체의 맛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다.
즉, 김치의 식감 변화·젓갈의 강한 감칠맛은 효소 활동의 결과물이며, 이들 발효 식품은 모두 효소가 주도하는 정교한 맛의 설계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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